할아버지의 유산   -   백지영(변동중2)
		"철퍼덕 철퍼덕 쏴아쏴아.” 회사일로 늦으신다는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나 보다.   우리집은 흑백 텔레비전과 더불어 박물관에 갈 만큼 오래된 양동이가 있다. 양쪽 귀퉁이는 찌그러지고 약간 그을린 자국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. 이것이 오래 전부터 우리집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. 6년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께 물려주신 유품이었다. 아버지께서는 이것을 가져오시고는 6년전부터 계속 사용하고 계시다.   물을 부을때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부딪히면 수비게 찌그러지는 것인데도 말이다. 이렇게 아버지께서 늦게 오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 단잠을 깨우는 저 미운 양동이…….   친구들이 놀러와서 무심코 양동이를 보면 놀리듯이 혹은 신기하다는듯이 요즘도 저런 것이 있냐고 묻곤 했다. 그 때마다 설명해 주느라 진땀을 뺏고, 아버지께 고물상에 주자는 원망어린 투정도 해 보았다.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.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니까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. 그 말씀을 듣고보니 더 이상 투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. 그런데 정말로 투정할 수 없게 만든 일이 일어났다. 바로 이번 여름 휴가때의 일이었다.   이번 여름 휴가는 보충수업도 있고 해서 주말에 큰아버지댁에서 보내게 되었다. 할아버지께서 계시지 않은 큰아버지댁은 왠지 쓸쓸했다. 큰아버지댁에 도착한 날 저녁, 온 식구가 마당에 모기향을 피우고 멍석 위에 둘러앉았다. 큰아버지께서 직접 키우신 수박의 맛이 좋았고 시끄럽게 우는 풀벌레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. 나는 아버지 어깨에 기대어 평소에 궁금했던 점을 여쭈어 보았다.   “아버지, 아버지께서는 왜 집에 있는 고물 양동이를 아끼세요?”아버지께서는 내 질문에 약간 의아해 하시는 듯 싶더니 말씀을 하셨다.     “아빠가 어렸을 때, 우리집에서는 작은 화재가 있었단다. 부엌에서 난 것이었는데 다행히 크게 번지지 않고 꺼졌단다. 그런데 부엌문을 열어보니 할머니께서 설거지 하려고 가져다 놓은 그 양동이와 무쇠솥 만이 약간 그을린 채로 놓여 있었다는 거야. 쌀 한톨이 아쉬웠던 시대라 불 속에서도 타지 않은 그것이 너무 고마웠고 신기했다는 거야.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그 양동이를 보실때마다 ‘허, 그놈 참 독하기도 하지, 다 타버렸는데…….’하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단다. 돌아가실 때도 나에게 ‘너는 막내로 자라서 항상 걱정이구나, 이 양동이처럼 언제 어디서도 굳세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라’하고 말씀 하시면서 그것을 아빠에게 물려주셨단다. 이런 소중한 물건인데 소홀히 다룰 수 있겠니? 아빠는 또, 그것을 볼 때마다 빈곤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단다. 사람들이 힘을 합쳐 어렵게 만든 것을 아직 못쓰게 되지도 않았는데 버려서야 되겠니?”   아버지의 전설 같은 긴 말씀을 듣고 나니 가슴이 찡했다. 그리고 문득 수학여행때 견학했던 포항제철공장의 모습이 생각났다. 그렇게 뜨거운 열기 속에서 힘들게 만들어진 철인데……. 나는 단지 옛 것이라고 버리자고 했다니, 너무 부끄러웠다. 그러고 보면 철은 우리가 보존만 해 주면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고마운 자원인 것이다.   이제 더 이상 양동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. 오히려 자랑스러울 따름이다. 그 숱한 세월동안 꿋꿋이 견뎌서 우리집까지 온 양동이가 아닌가! 집에 있는 빨간 플라스틱 양동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. 우리집에서 양동이를 쓰는 사람이 한명 더 늘어났다. 아침마다 시원히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할아버지의 교훈을 상기하곤 한다. 철의 고마움을 느끼며……. “  철퍼덕 철퍼덕 쏴아 쏴아.”